내 첫 해외 여행은 30살 가을이었다. 어린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취직 이후엔 일 때문에 '해외 여행'은커녕 국내여행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들으면 궁금증은 있었지만 크게 부러운 마음도 없었다. 왠지 나와는 너무 현실감 없는 먼 세상 얘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여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국제결혼을 한 오빠가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회사 일과 개인적인 문제들로 인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지옥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고, 어느날 문득 오빠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더불어서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내 정신을 지배했다. 나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내 정신적인 문제의 근원을 모두 떠안고 있는 공간으로부터.
그렇게 충동적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오빠가 있는 시카고로 2주의 짧고도 긴 여정을 떠났다. 첫 해외여행은 정말 말이 안 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13시간 비행을 하는 것도, 기내식을 먹는 것도, 비행기가 모국의 영토 밖에 떠있다는 사실도 모든 게 너무나 생경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도착 후에도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낯설었다. 난생 처음 내 두눈으로 직접 본 타향의 풍경부터 눈과 머리 색, 언어가 다른 자국민들 사이에 진짜 '외국인'이 된 내 모습까지. 나는 낯선 타국민들 사이에 둘러싸여 난생 처음 철저한 '이방인'이 되었다. 가장 낯설었던 건 그런 나의 존재였던 거 같다.
도착하자마자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밀레니엄 파크의 '콩' 모형에서 사진을 찍었다. 영어 교과서에 실려있었던 2D 사진이 눈앞에 거대한 조형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엔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사진으로 남겼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 같이 흔해 빠진 월마트를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것마냥 신기해서 연신 찰칵찰칵 찍었댔다.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잠깐 마트를 들른 외국인들에게 내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을까. (문득 관광지로 유명한 모교를 매일같이 등교하며 봤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겐 일상이 누군가에겐 여행이라는 말이 와닿던 순간.
여행은 예상대로 너무나도 즐거웠다. 우울했던 과거가 눈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낯선 풍경, 낯선 건물, 낯선 사람들, 낯선 음식들까지. 일상에서의 우울과 불안 걱정 따위는 없는 곳이었다. 물리적 거리만큼 나는 일상에서 물러났다. 일상의 걱정과 고됨이 없는 그곳은 나에게 집보다 안온하고 평온한 공간이었다. 일상과 더 적극적으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에 2주간 한국으로부터 오는 모든 연락 또한 차단했었다.
2주는 눈깜짝할 새 지나갔고, 돌아갈 때가 다가오자 다시금 우울이 밀려왔다. 여행을 가기 전보다도 극심한 우울이었던 거 같다. 막상 도착 후엔 잘 적응하여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만 말이다. ㅎㅎ 아무튼 첫 여행은 그렇게 끝이났다. 살면서 가장 사치스러웠고 가장 행복했던 2주동안의 여행의 기억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저자는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어서라기보단 "현재를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일상이 지치고 괴로울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한다. 일상이 너무너무 행복한데 굳이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행지에선 일상의 해야할 일들도 없고, 상처를 준 물건이나 공간들도 없다. 그런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우리는 괴로울 때 자꾸만 여행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행을 하지 못할 때도 우리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한다. 이 노력들은 일상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 치열해진다. 저자는 일상을 떠나는 수단을 '소설'이라고 얘기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유튜브, SNS, 웹툰 등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수면, 누군가에겐 운동 등의 건실한 취미일 수도 있다.
인터넷이 복잡하게 발달한 지금 우리는 구태여 멀리 떠나지 않아도 다른 나라에 있는 모든 문화들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속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여행이야말로 일상의 완전한 부재를 이루어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소설, SNS, 유튜브를 통해 현실을 잠깐 잊을 순 있지만 결국에 그것들은 모두 일상의 공간 내에서 이루어진다. 스트레스와 상처로 가득찬.
저자는 '여행'을 통한 일상으로부터의 탈피가 역설적으론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원동력과 에너지를 준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떠날 곳이 있다면, 우리의 일상도 결국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퇴사와 더불어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커졌고 여행이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여행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새로운 방면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거 같다. 지치고 무거운 일상을 그냥 언젠간 지나갈 여행쯤으로 생각한다면, 삶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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