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모든 논란을 잠재울 정도로 할리 배일리의 연기와 노래, 목소리는 탁월했습니다. 영상미와 노래는 뭐 디즈니의 주특기이니 말할 것도 없구요. 워낙 개봉 전부터 이런 저런 얘기가 많이 들려 저도 왠지 처음엔 색안경을 끼고 볼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초반부 할리의 Part of the World를 감상하시면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선인들을 목소리만으로 홀리는 사이렌의 매력적인 역할을 찰떡같이 소화합니다.
영화를 연출한 롤 마샬 감독은 최근 미국 매체 데드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유색인종을 캐스팅하려는 계획은 없었다. 그저 최고의 에리얼을 찾자는 생각 뿐이었다"며 "캐스팅을 막 시작했을 무렵 그래미 시상식에서 마치 천사처럼 노래하는 할리 베일리를 봤다"고 캐스팅 계기를 밝혔습니다. "베일리가 연기를 할 수 있는지도 모른 채 (오디션에) 불러들여 '파트 오브 유얼 월드'를 부르게 했는데 노래가 끝날 때쯤 나는 울고 있었다"며 "그 후로도 많은 배우들을 더 봤지만, 그가 세워놓은 기준을 넘는 사람은 없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야 그의 인터뷰가 한치도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씁니다. 역대 디즈니의 모든 주인공들의 노래 실력이 훌륭했지만, 할리 베일리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맑고 깨끗한 소녀같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력은 극을 보는 내내 온몸에 전율이 돋게 합니다.
영상이 다소 어두운 것은 맞으나 할리 베일리가 공격적이거나 무섭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일부 원작 팬들이 영화 깎아내리려고 계속 부정적으로 선동했단 생각밖엔 들지 않더군요;;.. 오히려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며 모험심이 투철한 소녀 연기를 잘 소화했습니다. 덧붙여 인어공주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선인들을 홀릴만한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인데,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감독은 최고의 인어공주를 캐스팅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주인공이 흑인으로 바뀌면서 약간씩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인어공주의 여섯 언니는 '각 인어가 일곱 대륙 바다를 설정한다'는 설정에 맞게 동서양 각지의 배우들이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조개껍데기와 꼬리를 지닌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육지 또한 여러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열대 지방 부근의 배경으로, 알록달록한 의상과 소품이 화면을 수놓습니다. 배경이 카리브해로 바뀌면서 에릭 왕자의 서사도 추가됩니다. 날 때부터 왕족이 아니라 흑인 왕비에게 입양돼 자란 인물이라는 배경이 더해집니다. 다양성을 강조한 설정들이 돋보이지요.
의도하지 않은 흑인 캐스팅으로 인해 영화는 오히려 원작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넘어서, 안데르센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한층 강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어공주는 작가 안데르센이 오랫동안 짝사랑 해왔던 에드워드 콜린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실감에 빠져 집필한 동화입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콜린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입니다. 안데르센이 양성애자였던 것이지요. 더욱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에게 동성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은 견디기 힘든 고문,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비극이지요..ㅜㅜ 그래서 인어와 인간의 사랑이 동성애의 은유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간과 인어를 앙숙으로 설정하고 서로에게 편견을 갖게 만든 것도 이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각각의 세계만 놓고 봤을 때 인어와 인간 모두 선하고 무해한 사람들이지만, 작은 편견이 집단 전체로 확장돼 서로를 악으로 매도하고 적이 됩니다. 안데르센은 이 지점에 대해 교훈의 메세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편견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세지를요.
그런 면에서 의도했든 안했든 흑인으로 캐스팅한 주인공, 7대양의 인어공주, 마지막 에리얼의 행복을 빌어주는 노인, 젊은이, 각국의 인종이 등장하는 인어들은 작품의 주제 의식을 한층 강화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빨간 머리의 백인 에리얼이 등장하고, 순수귀족 혈통의 왕자와 6명의 백인 인어들이 등장했다면 인어공주는 원작 이상의 그 어떤 것도 보여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과도한 PC라며 욕을 먹던 요소들이 만나 극을 더 다채롭게 만들뿐 아니라 다양성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이미 인종차별 문제와 다양성의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접하고 논의해온 어른들에게 '나의 에리얼' 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의 주 향유층이 어린이임을 생각했을 때, 오히려 편견과 사고가 굳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흑인 공주를 만들면 되지 않냐?는 논란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은데요. 막강한 원작을 통해 어그로를 씨게 한번 끌어주는 게 이후에 나올 작품들에도 더 큰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 판단합니다. 인어공주가 나오기 전에 할리베일리 주연의 흑인 공주 원작의 애니가 나왔다고 생각해봅시다. 반응이 긍정적일까요? 전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무슨 공주가 저래, 내가 알던 공주가 아니야."라며 비난했을 사람들로 넘쳐났을걸요? 도리어 인어공주의 주인공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흑인 공주의 이야기들은 더 편안하게 다가갈 겁니다. "그래 이렇게 하라고. 흑인 공주 이야기를 새로 만들면 되잖아. 바람직하다." 라고 대중들은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디즈니의 행보가 탁월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대중에 굴하지 않고 꿋꿋히 PC의 길을 걸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쉬웠던 점도 없었던 건 아닌데요. 이야기가 다소 평면적이었던 점, 다인종이 나왔다는 것 외에 스토리에 큰 변화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공주와 왕자 사이의 케미도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뮤지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음악과 영상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선 아쉬울 게 없었던 거 같습니다.
+흑인이 문제가 아니라 외모가 공주가 아니라서 싫다고 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생각해도 말에 어패가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미 예쁨의 기준을 백인 미녀에 두고 있는데 어떻게 전형적인 흑인 얼굴이 이쁜 공주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냥 난 백인 미인이 이쁘다고 생각하고, 예쁜 백인 여성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싶다고 솔직히 말하십쇼. 주인공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외모 비하 정말 눈살 찌푸려집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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